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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기쁘고 즐거웠었든 지난 이야기.

2018.03.01


어느 누구나 평생동안에 깊은 골짜기  어려움이나 가슴 설래는 기쁨의 추억들을 간직하며 살아간다.
불현득 어떤 일들이 내겐 기쁨의 특종들이 기억에 남아있을까 끄집어내본다.
6.25 전쟁 후  서울 수복이 이루어지면서 수많은 시골 사람 들이  새삶은 찻아 서울로 서울로 꾸역 꾸역  모여든 시절 이야기 이다.
가난한 농어촌 사람들의 미래를 향한 모험의 상경 이였든듯했다..당시 국민학교 6학년인 필자도 이유도 모른채 부모님의 음직임에따라 영등포 역 에 내림으로 서울 이민생활이 시작돼었다 
공부는 꽤나 잘하는 편이어서 아버님이  용산 중학교로 기울어져있을때
촌놈이 용산같이 좋은 학교는 언감생심이라며 영등포 중학교에 합격해도 장원급제 한것이나 다름없다 하시며 
먼저 서울에 와 계셨든 큰아버님의 엄포에 영등포로 결정돼어 입학 시험을  본듯했다.
발표하든날 두루마리를 돌돌 피며 방을 붙일때 328 내번호가 나타났다.너무 기쁘고 좋아서 집에 거서 신발도 못벗고 방에 뛰어들어간
기억은 내평생 잊지못할 제일 신나는 추억으로 각인돼있다.
성인이 돼어서 대학 졸업하든해에  해외주재 경리사원 모집 신문 기사를보고 응시 했드니  운이 좋게 합격했었다.
입사후 한두해를 기다려도 도무지 파견할 기회를 주지않코  공기업을 장악한 5.16 혁명 군인들의 낙하산 인사로 4년을 밀리다 72년 2월 8일 에 휘지 주재원으로 파견 발령을 받았다.
무엇보다 당시 한국 실정을 감안할때 해외에 나갈수있다는 설래임과 해방감 뿐 아니라
봉급이 곱으로 오르며 세금도 전액 면제 받고 주재수당도 달러로 큰돈을 받는 헤택을 누림이였다.
서울 이민와서 터지기만해 고생하든 부모님과 넉넉치못한 신랑 만나 늘 친정집 에서 주녹들은 집사람
신이나서 환하게 웃고다닐때가 엄청 행복했었든것 같았다.
5년임기를 마치고 본사에 귀국했지만 내가변했는지 한국이 변했는지 정말 수용할수  없는 5년을 버티다
미국방문 여권을 가지고 무조건 미국으로 들어왔다. 떠나는 전날 밤까지 말리든 아버지 " 네가 무엇이 부족해서 어린 손자들 데리고 이역만리로 떠날려 하는냐?".....하시면서 애를  태우셨다.
자리잡으면  빠른 시일에 초청할테니 너무걱정 마세요.'
말은 그럴듯했으나 영주권도 없이 들어온다는것을 아실리가 없었다.
공항에 엑스래이 필림을 가지고 들어온 금수저 이민자들은 필자가 천페이지를 쓴다해도 못알아들을 이야기일 것이다.
참, 멀쩡항 사람 기 죽이고 바보 돼는건 일개월도  필요 없었다.지우고싶은 어두운 옛날들을  많이 많이 만들무렵
꿈에그리든 영주권 통지 이민국 우편물 을 받을때 그 기분 
지금도 가슴이 콩닥질하는듯하다. 이보다 더좋을수 있겠는가?
제임스 강가를 향해 소리소리 질러보았다"
난  살았다고...
시간 많이흐른 지금 생각해보니
굴곡진 인생살이 처럼 보였지만 그건 내게  살아가는데 필요한 소중한 및거름이 였었다는 ... 
내가 믿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수 밖에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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