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없으면 다들 어떻게 사나?
나 박복(가명.75세)할머니는 오렌지카운티에 거주하시는 분이시다. 이런저런 일이 있을 때 마다 필자를 찾아 오셔서 상담을 하시곤 한다. 영감님은 할머니 젊은 시절 아들하나에 딸 둘 남기고 일찍 사고로 가셨다. 젊어서 청상과부가 된 할머니는 오로지 자식들 크는 재미로 수절하셨다. 첫째인 아들은 제 애비를 닮아 인물도 좋은데다가 머리 또한 수재여서 할머니의 희망이었다. 똑똑한 아들에 비해 밑의 두 누이동생들은 오빠에 영~ 미치지 못했다. 특히 막내딸은 어려서 열병을 앓은 뒤 육체도 성장하지 못하고 정신도 성장하지 못했다. 큰 딸은 어려서 부터 공부에는 흥미가 없고 남자들과 놀러 다니는 것만 좋아했다. 끼가 많은 아이였다. 이러다보니 아들에 대한 할머니의 편애는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기대에 부응하여 명문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나 할머니에게 기쁨을 준 아들은 대학도 한국에서 제일이라는 S대 자연과학부에 진학 하였고 졸업 후 학교의 추천으로 미국 유명 대학에 장학금을 받아 교환학생으로 유학했는데 청천벽력 이라고 그만 학교 앞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말았다.
시골에 내려가 있던 관계로 이 소식을 늦게 들은 나 할머니는 몇 번이나 까무라 치셨고 눈물바람 속에 팔자에도 없는 미국비행기를 타보게 되었다. 아들은 주변 지인들의 배려 속에 공원묘지에 안장되어 있었다. 비석에 새겨져있는 아들의 사진을 쓰다듬으면 울다 까무라치기 를 여러 번, 이러다가 사람 죽겠다고 주변에서 나 할머니를 억지로 병원에 모셔서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겨우 정신과 몸을 수습하여 한국으로 돌아간 뒤 두 딸을 데리고 미국에 다시 건너오신다. 아들이 묻힌 이곳을 떠나 살 수 없을 것 같았고 묘를 파내서 한국으로 이장하는 것도 평생 바둥거리며 살아온 아들의 오랜만의 편한 잠을 깨우는 것 같아 내키지 않았다 한다. 아무튼 이런저런 사연 속에 ‘산 사람은 또 살아가게 된다’ 는 말처럼 두 딸과 함께 열심히 미국생활을 하였다.
큰 딸은 미국에 와서도 그 끼를 버리지 못하고 이놈저놈과 놀러 다니며 자식을 생산해 나 할머니에게 선물(?)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웬 백인 아기를 선물하더니 그 다음에는 흑인아기, 또 세 번째는 일본아기를 선물했다. 세 번 살림을 차려 세 번 다 실패한 것이다. 정식 결혼은 아니고 동거였지만 참 글로벌하게도 다양한 인종과 연애하고 동거질 이더니 요즈음은 필리핀 남자와 살고 있다고 한다. 나 할머니는 손주들을 키우면서 ‘이것도 다 업보겠지!’ 라는 체념 속에 묵묵히 희생 하셨지만 색깔도 각각인 손주들을 데리고 한국 마켓에라도 가려면 창피해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라했다. 옛적에 이놈들 어릴 때 필자가 보니 백인아이, 흑인아이, 그리고 동양아이, 들이 한국말로 장난치고 싸우곤 하는데 정말 신기하고 기분이 이상했다. 나 할머니가 한국말로만 키우니 당연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신기했다.
아무튼 이런 어지러움을 준 큰딸도 있지만 작은딸은 나 할머니의 가슴을 메이게 한다. 어릴 때 앓은 열병 때문에 바보가 된 딸은 체구도 초등학교 저학년생 정도로 극히 비정상적으로 작다. 큰 딸이 갖다 맡긴 손주 중 백인, 흑인 손주는 커서 집을 나가 독립했는데 일본 씨인 세 번째 손주만 독립을 못하고 집에 남아있다. 지 이모마냥 이놈도 바보다. 원래 바보는 아니었는데 마약을 하도 많이 처먹어서 바보가 되었다. 이러니 나 할머니에게는 잠시도 떼놓을 수 없는 짐 덩어리가 둘이나 있고 가끔 찾아와 눈물, 콧물 흘리며 경제적 도움을 호소하는 큰 딸의 반갑지 않은 방문이 가끔 있을 뿐이다.
딸이 네 번째 살림을 차린 필리핀 남자는 지독한 노름쟁이 이며 의처증이 심하여 노상 마누라를 달달볶고 돈을 벌어오기는 커녕 태국식당 웨이츄레스 로 일하며 겨우겨우 생계를 이어가는 지마누라 돈 빼앗아 가는 게 장기다. 나 할머니가 딸에게 그런 놈 당장 떼버리라고 그렇게 난리를 쳐도 그놈의 뭐가 좋은지 그 고생을 하면서도 붙어 사는 게 신기하다고 하셨다. 나 할머니의 주 수입원은 집을 세놓아 받는 월세가 전부다. 거창하게 이야기하면 임대사업 이지만 그 규모는 영세하고 초라하다. 할머니에게는 부동산 붐이 한창일 때 어찌어찌하여 단독주택을 5채나 사게 되는 행운이 있었다. 아는 부동산 업자하나가 이렇게 저렇게 수단을 부리면 돈을 벌 수 있다 해서 하나둘 구입하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당시에는 크레딧만 있으면 0% 다운을 하고도 집을 살 수 있을 정도로 은행들이 돈을 못 꿔줘서 안달일 때였고 서류심사도 그리 까다롭지 않을 때였다. 신용점수(크레딧점수)를 이런저런 수단으로 좋게 만들어준다는 업자에게 돈을 주고 크레딧점수를 높인 다음 집을 사기 시작했다. 집값이 마구 오르던 때여서 다운없이 사논 집이 얼마 지나면 융자를 받을 수 있었다. 이 융자 받은 돈으로 집을 한 채 더 사는 식으로 내 돈 한 푼 없이 그리할 수 있었다. 나 할머니에게는 평생 처음의 행운이었다. 나 할머니는 그 집들을 시청 허가 없이 내부공사를 통해 벌집마냥 방을 여러개 들여서 세를 놓았다. 방 하나에 작은 부엌하나 또는 방 두 개에 작은 부엌하나 하는 식으로 주택하나에 10여 가구가 살 수 있게 쪼개놓고 600불에서 1000불식 저렴하게 세놓으니 수요가 꾸준해서 놀리는 방이 없을 정도로 방세사업은 잘 되었다. 여기서 나오는 임대수입으로 모기지페이 하고도 할머니 생활은 충분했다.
그런데 나 할머니에게도 나름대로 항시 고통이 있었으니 세입자들의 협박이었다. 벌집처럼 쪼개놓은 곳에 주변시세 반값에 가깝게 입주할 때에 이 주택개조가 불법인줄 모르고 오는 이는 없었지만 싼값에 입주해 놓고는 방세를 밀려 나 할머니와 마찰이 있을 때에는 거의 틀림없이 “시청에다가 불법 건축물로 고발하겠다!” 고 협박들을 해대었다. 어떤 나쁜 이들은 거의 6개월째 세를 안내면서 고발한다는 협박을 해대는 사람도 있었고, 세를 밀리고도 떳떳하게 떼어먹고 당당히 나 할머니 코앞에서 이삿짐을 싸기도 했다. 억울해서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고발할까봐 어떤 조치도 못하고 당해야하니 나 할머니 심정이 이해가 갔다. 다들 나 할머니의 딱한 사정을 다 알면서도 결국에는 노인네를 이용하고 협박하곤 했다. 그런 집에 들어가 살 정도이면 다들 정말 어렵게 사는 사람들 이어서 불쌍한 사람 사정을 알만한데도 이런 나쁜 사람들이 많았다. 가난해서 사람들이 악해진 것인지, 사람들이 악해서 그리 가난하게 사는지 모르겠으나 ‘가난한 이들이 더 악하다’는 말은 맞는 말인 것 같다. 오늘도 노심초사 밤잠을 못 주무시는 나 할머니의 인생 역정에 깊은 연민을 느낀다. 눈물을 글썽이며 “나 없으면 우리 새끼들 다 어떻게 사나?” 하시던 나 할머니 부디 건강하시길!
자료제공: GU DO WON (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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